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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조 상산부원군
중시조 상산부원군 후손 > 중시조 상산부원군
○ 생몰 : 1040년(靖宗 6) ~ ?
○ 가계 : 시중(侍中) 휘 희일(希逸)의 3자. 5세
○ 관직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공훈 : 벽상공신(壁上功臣)
○ 군호 :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
○ 소생 : 정당문학(政堂文學) 휘 치화(致和), 시중(侍中) 휘 치원(致遠), 평장사(平章事) 휘 경(鏡), 평장사(平章事) 휘 흠(欽)
6세 휘 치화(致和)
상산부원군 휘 비궁(匪躬)의 장자로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첨의평리(僉議評理),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지냈다.
6세 휘 치원(致遠)
상산부원군 휘 비궁(匪躬) 차자로 문하판사시중(門下判事侍中)을 지냈다.
6세 휘 경(鏡)
상산부원군 휘 비궁(匪躬) 3자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6세 휘 흠(欽)
상산부원군 휘 비궁(匪躬) 4자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7세 휘 리(理)
정당문학 휘 치화(致和)의 장자로 자는 계보(谿甫)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금양현 위(金壤縣尉)를 거쳐 국학 학유(國學學諭)를 역임하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였다. 손수 전원을 가꾸고 채소를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며 매일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뒤에 다시 벼슬에 나가 1126년(인종 4) 직사관(直史館)으로 있을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자 궁중에서 숙직하다가 『국사(國史)』를 짊어지고 산호정(山呼亭) 북쪽에 이르러 땅을 파고 묻어 소실되는 것을 막았다. 그 뒤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옮겼으나 곧 병을 얻었다. 근직(近職)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에 나가기를 원하여 예주방어사(禮州防禦使로 있다가 죽었다. 인종(仁宗) 때에 몸을 돌보지 않고 『국사』를 보전한 공으로 이부시랑 한림시독학사 지제고(吏部侍郞翰林侍讀學士知制誥)에 추증되었다.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7세 휘 우(瑀)
정당문학 휘 치화(致和)의 4자로 국자감 시문과에 장원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7세 휘 려(侶)
정당문학 휘 치원(致遠)의 장자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내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라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7세 휘 수(璲)
평장사 휘 경(鏡)의 아들로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다.
8세 휘 수규(受規)
자헌대부 휘 우(瑀)의 장자로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8세 휘 충(忠)
문하찬성사 휘 려(侶) 장자로 고려 원종(元宗) 때 중랑장(中郎將)으로 4차례나 왜적을 토벌한 공으로 오성군(筽城君)에 봉해졌다. 『동국사기(東國史記)』에는 ‘지략이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과 같다’고 평하였다. 뒤에 증손 영중추부사 휘 운보(云寶)가 귀하게 되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추증 받았다.
8세 휘 득운(得雲)
문하시랑 휘 수(璲)의 아들로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9세 휘 유요(惟堯)
휘 수규(受規)의 장자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와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9세 휘 자송(子松)
중랑장 휘 충(忠)의 아들이며 검교(檢校)로 중랑장(保勝中郞將)을 지냈고 손자 영중추부사 휘 운보(云寶)가 귀하게 되어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증직 받았다.
9세 휘 유순(惟舜)
대장군 휘 득운(得雲)의 장자로 한림 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9세 휘 유문(惟文)
대장군 휘 득운(得雲)의 차자로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자녀를 두지 못했다.
9세 휘 유무(惟武)
대장군 휘 득운(得雲)의 3자로 형부 시랑(刑部侍郎)을 지냈다. 자녀를 두지 못했다.
10세 휘 위(韙)
대장군 휘 유요(惟堯)의 장자로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10세 휘 언(彦)
중랑장 휘 자송(子松)의 아들로 충숙왕(忠肅王)의 특명으로 낭장(郞將)에 임명되고 1360년(공민왕 9)에 판장군(判將軍)과 별장(別將)에 올랐으며 뒤에 아들 영중추부사 휘 운보(云寶)가 귀하게 되어 우의정(右議政)을 추증 받았다.
10세 휘 제(題)
한림학사 휘 유순(惟舜)의 아들로 검교(檢校)를 지냈다.